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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에 활동했던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고구려에 대해 평가하였는데 사람은 호전적이고 지형은 험준하며 단합력이 높아 침공해 복속시키기 어렵다 설명하였다. 때문에 먼저 내부의 갈등부터 만드는 것이 우선이며, 이를 위해 공작 활동으로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외교나 군사 작전을 통해서 굴복시킬 것을 제시하였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중 오녀산성(五女山城, 환런현)을 도읍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개칭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부여에 남아있던 어머니 하유화가 죽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황제는 각 지역의 왕과 제후들에게 성씨를 하사하고, 왕과 제후들은 그 신하들에게 성씨를 하사하여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 각 나라의 성씨 제도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무래도 중국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고대에서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의 전시대에 걸려 존재했던 불교건축은 한국건축사를 알고자 할 때 반드시 알아야 되는 분야였다. 필자도 90년대 후반 한국건축사를 전공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불교건축에 대한 연구도 같이 시작하였다. 그런 연유로 박사학위 논문을 고대 불교건축으로 하게 되었다.


그런 스님이 천 년 세월 동안 가야산 해인사에 기거하다 이번에 처음 절 밖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만약 북에서 태조 왕건의 조각상이 내려와 둘의 극적인 만남이 성사됐다면 “스승과 제자, 천 년만의 해후”가 됐을 겁니다.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라고 박물관에서 미리 널찍하고 조용한 공간까지 마련해 놓았더군요. 전시 기간이 아직 넉넉하니 기적 같은 만남이 성사될지 혹시 또 모를 일입니다. 단군왕검이 도읍한 지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은나라에서 기자(箕子)가 동래하여 임금이 되고, 단군은 신(神)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기자조선의 시작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유무와 기자조선의 성격 그리고 기자의 혈통에 관하여 논란이 많다.


판관 밑에는 색전이라는 향리가   있었는데, 실제로 조세 등을 거두고 개경의 창고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각 지역에서 생산된  곡식은 조창에 모아 배로 운반하였다. 뭍에서  가까운 곳으로 곡식을 옮길  때에는 지게나 달구지를 이용하였고, 소 등에  기르마를 올려 운반하기도 하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실을 수  있는 달구지는 보통 벼 15에서 20가마니를 나를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가의 위상을 제후국체제로 하느냐 고려처럼 실질적인 황제국체제로 유지하는냐는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제후국체제로 정리되었다. 그결과 비록 묘호는 조와 종의 황제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원칙적으로 제추국체제로 운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러한 점은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성리학의 명분론과 그 연장으로서의 화이론(중국은 황제국‘화’, 주변국가는 제후국‘이’)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결사적으로 고려를 침략했을까? 왜구가 창궐하던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1333년 멸망하고 무로마찌 막부가 들어섰으며, 동시에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적하는 남북조시대였다. 당연히 중앙의 통치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였고, 그 틈을 타서 각 지방의 무사들은 자신들의 영지 획득에 혈안이었으며, 그 와중에서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1세기 동여진 해적이 고려의 동해안을 노략질하자 고려는 성을 쌓고 전함을 배치하여 이를 막았다. 1019년 ‘도이’에 납치되었던 한 일본 여성은 자신을 구출해 준 고려 수군 병선(兵船)이 2층으로 되어 있고, 병선 선수에 적선과 부딪혀 부술 수 있는 철제 뿔이 달려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1274년과 1281년 여원연합군의 일본 공격 때 각각 900여 척의 고려 군함이 동원되었다. 이 때 원나라 배는 태풍을 만나 부셔졌지만, 고려 배는 손상이 적었다. 왕운(王惲)의 『추간선생대문집(秋澗先生大全文集)』에 따르면 “크고 작은 함선들이 파도 때문에 다 부서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戰船)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285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도 여러 척의 배가 등장한다.


또 군국(軍國)의 기밀과 숙위(宿衛)를 맡은 기관을 중추원(中樞院)[h] 이라 하고 그 장관을 판원사(判院事)라 하였다. 중추원은 삼성과 더불어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그 고관을 추신(樞臣)이라 했고, 삼성의 고관인 재신과 아울러 재추(宰樞)라 불렀다. 특수 기관으로, 국가의 주요한 격식(格式)을 결정하는 식목도감(式目都監), 감찰을 맡은 사헌대(司憲臺), 조명(詔命)을 맡은 한림원, 모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사관(史觀)[i], 대학으로 국자감(國子監)이 있었다.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이 시작되어 공양왕 2년(1390)에 완료되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중추원  승선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승선은 국왕의 명령을  해당 관청이나 관료에게 전달하고, 또 관청이나 관료들이  아뢰는 문서를 국왕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물론 승선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고 문서의내용에 따라  전달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그 밖에 국정의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국왕의 자문에 대답하는 측근관료의 기능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패배 요인은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신라의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신라인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권위이며 상징인 왕을 등에 업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왕건에게 선두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의 신하로서 왕을 죽인 자기모순이며,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신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민심까지도 점차 그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도 신하로서 왕을 시해했다는 비난이 주된 것이었다.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한 것은 토지를 욕심내서인가, 반역을 토벌하여 해서인가.


사원의 농지는 시납,  개간, 매득 그리고 국가의  사급 등 다양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려는 불교사회로 국왕이나 귀족 및  일반 농민들은 불교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토지를 사원에 시납하는 일은 흔하였다. 그런데 토지를 시납할  수 있는 층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실이나 중앙의  고관, 지방의 토호가 중심이었다. 농지를 소규모 소유하거나 혹은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이 토지를 시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이 뇌물을 써서 내시가 되려고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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